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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  봄에 걷기 좋은길 - 시인의 봄꽃 트레킹조선 매화를 만나러 가는 길 / 산청군 단성면 운리 단속사(斷俗寺) 옛터
    글.임태주/ 사진.김인호 | 승인2017.03.03 12:47

    조선 매화를 만나러 가는 길    밤새 달린 버스가 멈춘 곳은 속세와 인연을 끊는다는 단속사 절터였다.  

    사람마다 못 견디는 게 있다 . 낯선 자리를 못 견딘다거나 불편한 관계를 못 견딘다거나 뒤에서 들려오는 험담을 못 견딘다거나 혼자 있는 걸 못 견딘다거나. 나는 견딘다 . 다만, 봄을 못 견딘다 . 봄을 감지하는 경로는 여러 가지다 . 나는 폐로 봄과 접선한다 . 봄은 은밀하게 상승한다 . 볕에 데워지는 흙과 공기와 바람과 물과 나무는 시시각각 고유의 냄새를 발산한다 . 폐가 봄을 흡입할 때는 냄새 분자의 개별적 고유성을 존 중하지 않는다 . 냄새들은 서로를 빨아들이고 열렬하게 몸을 섞는다 . 혼융된 향기는 폐부의 회로를 따라 뇌 로, 내장으로 거침없이 침투한다 . 심장의 실린더에 분사된 봄의 입자들은 혈액을 뜨겁게 펌프질한다 . 참아 내기 힘들다 . 절제는 흐트러지고 육체는 흐느적거린다 . 3월의 공기는 겨우내 벼린 정신의 검을 일시에 무장해제해버린다 . 나는 고요를 흠모하는 사람이 . 그 해 3월의 유혹이 아니었면 고요와 살림을 차렸을 것이 . 매화나무는 매화를 피운 . 봄날이 시키면 어디에서건 매화나무는 꽃망울을 맺고 여차하면 터트린 . 흔한 일이라 새로울 것이 없 . 매화에 대한 모욕 이 , 그가 반박했다 . 나는 심드렁하게 그를 바라봤 . 한자리에서 목숨을 해 몇백 년을 살아내는 일이 흔한가, 그가 내게 물었 .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 이 그리 쉬운가, 그가 내게 물었 . 다가보지도 않고 만 난 적도 없으면서 다를 바 없으리라고 말할 수 있는 가, 그가 내게 물었 . 당신은 단 한 번이라도 당신이 밟고 서 있는 자리만큼이라도 온전히 당신 자신으로 채워본 적이 있는가, 그가 내게 물었 . 어느새 나는 등뼈를 곧추세우고 앉아 있었 . 그가 밤에 가야 한다고 . 하는 수 없이 밤에 따라나섰다 . 꽃을 보러 가 는데 왜 낮이 아니고 밤이어야 하는가, 나는 물었 . 가보면 안 , 그가 수묵화처럼 여백을 남기고 말했 . 산청군 단성면 운리. 밤새 달린 버스가 멈춘 곳은 속 세와 인연을 끊는 는 단속사 절터였 . 바람은 숨죽 였으나 공기는 차고 달빛은 괴괴했다 . 불 꺼진 몇 채 의 지붕 낮은 집들이 절터를 마당 삼아 가람처럼 옹기 종기 배치돼 있었 . 매화는 보이지 않았 . 나는 높은 공중에 매달린 희고 고운 매화 천지를 상상했다 . 그가 가리킨 곳에 매화나무 한 그루가 겨우 있었 . 지붕 낮은 집들과 키를 맞추어 단아하게 있었 . 실망스 러웠 . 눈치를 챘는지 고려 말 정당문학을 지낸 강회백이 심은 나무라고 그가 말했다 . 벼슬을 따라 정당매라 부른다고 했다. 600년을 산 고매라고 했다. 기력이 쇠잔해 언제까지 꽃을 피울지 가늠할 수 없고 . 말하는 그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 . 나무에 검버섯 같은 이끼가 닥지닥지 달라붙어 오래된 유물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. 꽃은 화려하지 않았고 창백한 병자의 얼굴 같았 . 애잔했다 . 봄은 나무에게도 사람에게도 한 해를 살아냈음을 확인하는 생존증명서인 것인가.

    들판에서 바람을 이겨낸 이름 없는 나무여서 '야매'라고 부른다고 했다. 기품있고 정숙했다.

    그를 따라 농로를 한참 더 걸어 내려갔다 . 들판 언덕 배기에 거칠게 가지가 휘늘어진 우람한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. 들판에서 바람을 이겨낸 이름 없는 나무여서 ‘야매’라고 부른다고 했다 . 기품 있고 정숙했다 . 꽃나무 아래 들어서자 폐부가 절로 열렸다 . 나무 아래에 매화 향기가 고여 있었다 . 향기는 달빛에 눌려 발효되고 있었다 . 달빛과 몸을 섞은 농축된 향기가 폐 속으로 유입됐다 . 아찔하고 아득해서 허공이라도 붙잡 고 서 있어야다 . 왜 밤이어야 하는지 비로소 이유 를 알게 되었다 . 그 밤 나는 잠을 설쳤다 . 여자의 살 냄새 같은 것이 숨을 쉴 때마 내 안에서 풀풀 새 나왔기 때문이다 . 다음 날에는 시천면 사리에 있는 산천재로 갔다 . 450년 전 남명 조식 선생이 손수 심어 향기 를 즐겼다는 남명매를 만났다 . 고결했다 . 가파르고 정결한 조선 선비의 성품이었다 . 뼈에서 꽃을 피운 듯 고고했다. 눈에 담는 꽃이 있고 마음에 담는 꽃이 있다고 했다. 매화는 술과 같아서 취할 뿐 어디에도 담아둘 수 없다는 것을 그 봄에 알았다 .사람은 왜 걷는가. 폐 때문이다 . 봄에 왜 떠나는가. 폐 때문이다 . 꽃이 그리 쉬운가. 아니다 . 마지막일지도 몰라 안간힘을 다해 피우는 것이다 . 그대는 그대의 자리를 자신의 향기로 채워봤는가. 물들일 염료도 향유도 마련하지 못했다 . 누추하다 . 봄을 견디는 게 자랑인가. 서럽고 쓸쓸한 일이다 . 가보지도 않고 매화를 봤다고 말할 수 있는가. 거지 같은 일이다 . 당신은 왜 새봄에 다시 살아있는가. 폐가 다리에게 명령하는 것을 듣기 위해서 . “걸어라, 나의 다리여! 뼈가 삭기 전에.” 

     

    림태주
    시인,에세이스트다.산문집 <이 미친 그리움>과 <그토록 붉은 사랑>이 있다.3월이 오면 매화에 미쳐 조선조 매화를 찾아 다닌다. 


    글.임태주/ 사진.김인호  emountain@emountain.co.kr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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